레 탄 빈 씨는 20세에 군에 입대하여 "양형제"로 임명되었습니다. 그 후 병참 아카데미에서 수학한 후, 3군구 군사 학교에서 교사로 일했습니다.
빈 씨는 은퇴한 지 16년이 되었지만, 그와 그의 동료들이 어려움을 극복하고 군인들의 식사를 최대한 완벽하게 만들었던 시절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힘든 시간
1975년, 나라가 해방되고 수많은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군에 입대했던 빈 씨는 제285 미사일 연대에 배속되었습니다. 취사장은 거의 100명에 달하는 장교와 병사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업무를 담당했습니다.
빈 씨의 기억에 따르면, 당시 요리사에게 가장 힘든 일은 시장에 가서 아무도 굶주리지 않도록 요리하는 것이었습니다. 군인들은 같은 식탁에 앉아 식사할 때 서로 얼굴을 봐야 했습니다.
6인용 쟁반에는 지름 약 40cm의 음식 쟁반이 하나씩 있습니다. 음식에는 짠 음식 1개, 담백한 음식 1개, 그리고 국 한 그릇이 포함됩니다. 짠 음식은 보통 튀긴 고기나 삶은 고기입니다. 담백한 음식은 주로 시금치를 볶거나 삶은 채소입니다.
빈 씨는 재치 있게 말했다. "고기가 많지 않아서 얇게 썰어야 하는데, 바람에 날려 버리거든요. 한 사람이 평균 두세 조각밖에 못 먹습니다."
"무인" 수프는 보통 삶은 채소로 만듭니다. 끓인 후 채소를 조금 남겨두고 물을 더 붓고, 젓갈과 소금으로 간을 해서 수프를 만듭니다.
그날 군인들의 아침 식사도 밥이었습니다. 아침 식사에는 음식이 없었고, 희석된 생선 소스만 있었습니다.
아니면 탄 밥으로 익숙한 생선 소스를 만들어요. 탄 밥을 화덕에 구워 색깔을 내는데, 검게 타지 않아요. 그런 다음 물에 넣고 소금과 양념 가루를 섞으면 아침 식사용 생선 소스가 돼요.
또 다른 방법은 바나나 잎을 끓여 생선 소스를 만드는 것입니다. 아침 식사로 참깨소금을 곁들인 밥을 먹는 부대원은 매우 품위 있는 사람으로 여겨집니다.
그 당시에는 갈랑갈을 밥에 섞어 먹는 요리도 있었습니다. 갈랑갈을 빻아서 굽고, 새우젓이 들어 있다면 밥에 섞어 먹었습니다. "1979년 이후, 군인들이 갈랑갈을 채취하러 숲에 들어가다 지뢰에 자주 부딪혔기 때문에, 그때부터 숲에서 갈랑갈을 캐는 것을 금지하는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식량이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주방 기구도 극히 간소했습니다. 가장 익숙한 물건은 비행기 잔해나 폭탄 포탄 같은 것으로 만든 무쇠 냄비와 알루미늄 냄비였습니다.
병력이 많은 부대는 가마솥에서 밥을 지어야 했습니다. 가마솥 하나의 지름은 약 1~1.2m였습니다. 가마솥에서 밥을 지을 때 제대로 하지 않으면 밥이 타버릴 위험이 컸습니다.
주방은 때때로 300~500명의 군인에게 음식을 제공했고, 빈 씨 혼자서 동시에 6~7그릇의 밥을 지어야 했는데, 각 그릇에는 20~25kg의 쌀이 담겨 있었습니다.
"지금의 전기밥솥에 비하면 가마솥으로 밥 짓는 건 훨씬 더 어렵습니다. 하지만 기술이 좋다면, 지금 전기밥솥으로 지은 밥보다 가마솥으로 지은 밥이 훨씬 더 맛있을 겁니다."
1995~1996년에는 군인들이 일부 야채, 닭고기, 돼지고기, 생선 등의 생산을 늘리기 시작했고, 식사 수준도 점차 개선되었습니다.
행복했던 기억과 슬픈 기억

빈 씨는 예전에는 아이를 키우는 게 정말 힘들었다 고 털어놓았습니다 . "그때는 전기도 없고 선풍기도 없었어요. 하루 종일 부엌에 있었는데, 날씨가 더웠고, 다들 땀을 뻘뻘 흘렸어요. 정말 힘들었어요."
게다가 요리사는 아침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아주 일찍 일어나야 합니다. 밥은 오전 5시 30분에 나눠야 하므로 주방 직원들은 새벽 4시에 일어나 요리를 해야 합니다.
지휘관 시절에는 새벽 3시 30분에 일어나 부엌에서 소리가 나는지 살피며 누워 있곤 했습니다. 소리가 나면 누군가 깨어 있다는 뜻이었죠. 당시에는 지금처럼 자명종이 없었습니다. 부대 전체에 자명종이 있다면 당직 병사에게 우선권이 주어졌습니다.
빈 씨는 규정에 따라 군인들은 오전 6시 30분에서 7시 사이에 훈련과 훈련을 시작한다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아침 식사는 반드시 제때 먹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수백 명의 모든 활동에 차질이 생길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부대가 사이공으로 가서 임무를 수행하던 시절의 행복한 추억을 떠올렸다.
해방 후 몇 년 동안 사이공에서는 소고기가 돼지고기보다 더 친숙하고 저렴한 음식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소고기를 좋아하지 않았고, 어떤 사람들은 알레르기 때문에, 또는 냄새 때문에 소고기를 먹을 수 없었습니다…
"이 두 집단은 다릅니다. 싫어하는 집단은 먹을 수는 있지만 먹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먹을 수 없는 사람들만 특별한 방법으로 요리될 우선권을 갖습니다.
한때 '쇠고기 금식'을 보고하는 군인들이 너무 많아서 매 끼니마다 '쇠고기 금식' 신문지를 2~3개씩 챙겨야 했던 적이 있어서, '가짜 금식자'를 찾아내는 방법을 생각해냈습니다.
밥을 지을 때는 소고기 육수 한 국자를 떠서 밥솥에 붓습니다. 식사 시간에 소고기를 정말 '절대' 먹지 않는 사람들은 밥그릇을 집어 바로 내려놓습니다. '가짜로 절제'하는 사람들은 아무 생각 없이 식사가 끝날 때까지 먹을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내일부터는 '가짜 쇠고기를 삼가는' 사람들에게는 어떠한 특혜도 없을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증거가 있으니 모두가 받아들여야 합니다."
빈 씨의 기억 속에는 군대에서의 거의 모든 식사가 전우애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아픈 사람은 누구든 우선적으로 최고의 음식을 제공받았습니다. 부엌에서는 몸이 좋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죽을 끓이고 먹기 편한 음식을 만드는 것을 우선시했습니다."

빈 씨는 사이공에 머무르는 동안 1976년 설날 연휴에 즐거운 추억을 만들었는데, 지금도 그 추억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해 설날 첫날 아침, 연대 정치위원이 부대를 시찰하고 모두에게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고 인사하러 내려왔습니다. 정치위원은 그날 점심 메뉴에 대해 물었습니다.
군인들의 뗏 식사에는 삶은 닭고기, 반쭝, 지오차 등 다양한 요리가 있었고, 심지어 삼겹살을 넣은 생선찜까지 있었습니다. 생선찜 요리를 보고 정치위원은 주방에서 일 년 내내 생선찜만 먹는다며 비난했습니다. 그런데 왜 군인들에게 뗏에도 이 요리를 제공했을까요?
나는 이 생선 조림 요리가 평소와 달리 특별하다고 말했다. "오늘은 고등어 조림을 드셔 보세요." 그때는 고등어가 사치품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정치위원은 내 대답을 받아들였다.
그가 돌아왔을 때, 나는 그에게 고등어 조림 한 조각을 건넸다. 나중에 정치위원은 그에게 감사를 표하며, 조림 고등어가 매우 맛있어서 설날 잔칫상에 차려놓을 만하다고 말했다.
요리사이자 물류 교사로 재직하던 시절, 빈 씨는 자신의 임무에 자부심을 느꼈고, 팀원들이 장교와 군인들의 건강, 체력, 사기를 높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에 대해서도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그는 셰프로서 가장 큰 목표는 식사 시간이 되었을 때 모두가 설렘을 느끼고 음식을 즐길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이 셰프의 가장 큰 성공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사진: 캐릭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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